미련 - 단편

미련 - 단편

시베리아 0 374

-미련-




그녀의 시조 한수가 허공에 산산히 부서진다. 잔을 들고 그 음조가 오가는 허공 속에 그녀의 미소가 흐르고, 가냘프게 울렁대는 그녀의 춤사위가 소리자락에 이어지는데 그 형국은 어떤 비수보다 날카롭게 나의 가슴에 와서 꽂히니….. 그녀는 다소곳이 일어나 상을 물리고, 내 앞에 다시 앉아 절을 올린다. 




‘나으리, 이년, 이래 살다가도 아무 여한 없사옵니다. 부디 옥체 보존 하시어 대업을 이루소서.’




‘스르릉….’




촛불이 일렁이면서 방안에는 시퍼런 검기가 가득 차 올랐다. 촛불에 비추이는 그녀의 삼단 같은 머리 결에 치켜든 칼날의 섬광이 반사 되면서 나는 잠시 머뭇 거리고 있었는데, 생각은 벌써 그녀를 만났던 그 때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고…….. 








‘뭬이야? 장터에 뭔 구경이 났디야?’




‘하이고, 나도 몰러, 저게 시방 사람이여, 개떼여?’




장터의 주막 근처에서는 꾸역꾸역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의례 장날에는 그렇듯이 사람들의 왕래가 폭주하는 주막 근처에서는 쌈박질이 벌어지곤 했으며, 별다른 관심도 끌지 못한 채, 시시하게 끝이 나곤 했지만, 이번 경우는 좀 달랐다. 통행이 불편할 정도로 둘러선 사람들은 왁자지껄한 함성도 못 지르면서 무언가를 계속해서 주시하고만 있었다.




‘허, 어서 길을 비키시지요!’




호령을 치는 사람은 나는 새도 떨어트린 다는 이조판서 김 대감댁 가신 이었다. 그 가신의 앞에는 보기에도 남루한 복장의 양반이 바닥에 널부러져 비실비실 웃고 있었고…..




‘허어, 이 사람아!, 불쌍한 이 인생, 장날 판에 얻어먹을 탁주 푼도 없으니 어떻게 하겠나? 양반 체면에 비럭질은 할 수 없고, 높으신 양반, 행차나 막아볼 밖에….’




둘러선 사람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하고 있었다.




‘어이구, 저것도 양반 이랍시구. 빙신 육갑 떨고 앉았네!’




‘자네 몰러? 저 인간이 바로 장성군 이라고 왕족의 먼 혈족 아닌가베? 저렇게 장터에서 비럭질 하는 걸, 궁에서는 알랑가 몰러?’




‘근디, 왕족이면 다 잘 살아야 되는 거 아닌감?’




‘모르는 소리 말어. 임금의 성은을 하루 달랑 입어, 새끼는 깠을 지언정, 첩지 하나 받아 설랑은 냉궁에 쳐 박힌 년들이 워디 한둘이여? 게다가 삼년전 선왕이 붕어하시고 설랑은, 그 떨거지 년들은 궁에서 내쫓겨 가지구 몽조리 절로 들여 보낸 거 자네도 알지? 저 인간, 중 되기 싫어 저렇게 비럭질 하면서, 이 장터에 빌붙어 사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인줄 아는감?’




‘서열이 워낙 낮은 갑써?’




‘암. 세자께서 눈 벌거이 뜨고 있다 가니 선왕 붕어 하시고, 바로 즉위 허셨는디, 제깐 눔이 왕족이랍시고 껍쩍 될 수 있다요? 개국공신도 나중에 칼 들이댈까 무서워, 댕겅댕겅 목치는 판에, 지 아무리 선왕의 피가 섞였기로 서니, 서열도 젤루 꼬래비 겠다, 칼 들이대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겄소?’




그 가신은 걸뱅이 에게 적선 하듯, 품에서 엽전을 몇 닢 꺼내 그 남자의 눈 앞에 흩뿌린다.




‘벌레보다 못한 인생….구차하지도 않은가!’




혀를 차며, 돌아가는 그 행렬에는 관심이 없는지 그 남자는 바닥에 떨어진 엽전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호들갑을 떨며, 바닥을 긁어대고 있었다. 그 남자는 바로 나 였다. 그 당시의 내 모습은 그러했다….화려했던 궁중 생활이, 하루 아침에 선왕의 서거로 바뀌어 질 때 까지도, 설마 이렇게까지 비참해 질 줄은 꿈에도 상상할 수가 없었다.




‘히히, 돈이다, 돈! 이걸루 다가 민생고나 해결 할란다.’




미친 거렁뱅이 흉내를 내면서 김대감의 행차에 앞을 가로막은 것은 나 나름대로의 울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원래 첩지를 받은 떨거지 들은 퇴궁을 명 받게 되었지만 군의 호칭을 지닌 자제들은 궁에 머무를 수가 있었고, 만일 혼인을 하였을 경우에는 궁 밖에서 그나마 명색을 유지할 정도로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전례를 깨고서 강력히 밀어부친, 김대감의 상소문이 그것 이었다. 자신의 권력 장악과 실권을 미처 쥐지 못한 임금의 수족을 비틀기 위한 김대감의 비열한 세력 놀음의 첫 출수….. 죽이지는 않되, 왕족임을 내세우지 못할 정도로 그 삶을 깎아내려 구석에 쳐박히게 하려는 그의 음모. 그자는 이제까지 왕조의 내부에서 벌어 졌던 왕족 간의 세력다툼으로 야기된, 피의 역사를 예로 들어, 만조백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음 보위를 이을 왕세자를 제외하고는 모든 왕족의 직제와 권리를 박탈하여 궁 밖으로 내쫓았던 것이다. 나처럼 궁에서 보위를 이을 계제는 못 되어도 풍요로운 삶을 영위했던 인간이 아무런 보장도 없이, 궁 밖으로 쫓겨 난다는 것은, 바로 죽으라는 말 보다 더 비참한 앞날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허기진 배를 움켜 쥐고, 주막으로 달려간 나는 호통을 치면서 평상에 자리를 잡았다.




‘주모! 주모! 나 왔다니깐! 이거 보라지? 이게 돈이 아니고 뭔가 말이야! 낄낄낄…..어서 국밥 푸짐하게 한 사발 말아다 주고, 탁주도 한배지기 부탁 험세….’




그러나, 나는 주량도, 허기짐도 이기질 못하고 있었다. 이미 내가 받아 마신 술과 음식은 그 돈의 크기를 넘어서고 있었지만, 주모는 눈치를 때려가며, 술을 따르고 있는 들병이 에게 아무 소리 말라는 눈짓을 연신 날리고 있었다. 아마도 제풀에 지쳐 뻗어야지, 그렇지 않고 시비를 걸었다가는 그나마 대목인 장날의 장사를 망칠 수도 있다는 생각 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눈치를 알고 있었다. 더 이상 술을 만류하는 주모에게 삿대질을 하며, 언성을 높이자, 집안에서 거들먹 대고 있던 떡대 들이 기어 나와, 나를 난짝 들어다가는 싸릿문 밖으로 패대기질을 치고….




‘정신 쫌 차리지, 시절이 어느 땐 줄 알고….’




나는 빈 속에 들이킨 탁주로 걸음조차 제대로 걷질 못하고 있었다. 세상이 울렁거리면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그래, 어차피 바로 되지도 못할 세상, 돌기라도 돌아야지…..나는 하늘이 노래지는 것을 마지막으로 똥개천에 머리를 쳐 박고 정신을 잃고야 말았다. 얼마나 정신을 잃었을까? 내 귀에는 고즈넉한 거문고 가락이 은은하게 들리면서 향긋한 내음이 코를 진동 시켰다.




‘아그그, 머리야!’




머리가 뻐개지는 것처럼 아파왔다. 그러나, 방안은 잘 정돈된 모양 이었고, 벽에는 곱게 성장한 여인네의 자태를 그려 놓은 그림이 보기 좋게 걸려 있었다. 양반댁은 아닌 것 같았으나, 그 기품은 놀라울 정도로 안정감이 있어 보였다. 나는 방안을 둘러 보다가 나 자신을 내려다 보면서,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입고 있는 옷은 보기에도 값나 보이는 비단 이었고, 누가 씻겨 놓았는지, 언제나 벼루지가 지랄발광을 하며, 토끼새끼 마냥 뛰어다니던, 꼬질꼬질 했던 살껍질은 뽀얗고 말끔하니, 씻기워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꿈인가, 생신가?




‘기침 하셨나이까?’




벽에 걸린 화폭 속의 그 여인네 였다. 손에는 꿀물이 담긴 사발을 받쳐들고….




‘내가 어찌하여 이렇게…’




‘미천한 년이 누추하오나 제 처소로 군을 옮겼나이다. 용서하소서.’




‘내가 누군 줄 알고…’




‘어찌 모르리이까?……. 하여 그리된 것이니 너무 궤념치 마시고 편히 거하시옵소서.’




나는 다소곳이 예를 올리고 방을 나가는 그녀를 황망간에 만나게 되었다. 정신을 차리고, 의관을 갖추려고 방을 둘러보니 내가 입고 있던 넝마에 가까운 도포는 간데 없고, 일습으로 해온 듯한, 기품 있는 옷가지와 건이 벌써 놓여져 있는 것이었다. 대강 의관을 꿰고 좌정하자마자, 그녀가 상을 차려 들고 들어왔다. 아무 말 없이 상을 놓고 나가고, 나도 아무런 대꾸 없이 수저를 들었지만, 어제의 폭음으로 인해 입안은 가시가 돋친 것처럼 깔깔해서 양껏 들지는 못하고 있었다. 거지반 쉬엄쉬엄 곡기를 여밀 즈음에, 그녀가 다시 숭늉을 들고 방으로 들어 왔고, 나는 숭늉을 들이키고 난 후, 상을 치우기 전에 그녀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어찌하여 나 같은 잡인을 돕고 있는가?’




‘잡인이라니 당치도 않으십니다. 지금은 옥체를 보존하시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아무런 말씀 마시고, 이곳에서 기거하시옵소서. 그럼 소저 물러 가옵니다. 문밖 출입이 불가하여 다소 답답 하시더라도 이곳은 식솔들도 출입하지 아니하니, 뜰을 거니시는 정도는 아무런 문제 없을 것입니다.’




’너는 내가 누군지 알고 있느냐?’




‘네, 알다 뿐이겠습니까!’




그녀는 나에게 눈조차 맞추질 못하고 있었다. 몰락한 선왕의 보잘 것 없는 핏줄이란 것조차 알고 있는지, 그 당시에는 감히 물어 볼 엄두조차 못내고 있었고….시간은 정말 화살처럼 시위를 떠나고, 그 집에 거한지도 달포가 넘어가는 즈음, 나는 바깥 세상의 일들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끼니때 마다 얼굴을 대하기는 하나, 별 말이 없는 그녀 였기에, 나는 그저 하릴 없이 밥만 축내는 사랑방의 식객보다도 못한 존재로 나 스스로 여길 정도였다.




‘자네, 요즈음 바깥 세상은 어찌 돌아가는지 얘기해 줄 수 있겠는가?’




‘어찌 미련한 소저에게 물으시는 지요? 정히 궁금하실 것 같아 오늘 저녁, 긴히 만나보셔야 할 분께 연통을 넣어 놓았지요. 기다리소서.’




그녀는 나의 마음 속을 환히 꿰뚫고 있었다. 밤이 이슥하여 그녀는 한 거구의 사나이를 모셔왔다. 도포의 품새가 단아하고, 척신이 장구한 것으로 보아 무인의 호골 임이 분명했으나, 둘러 쓴 갓의 앞부분을 명포로 내려뜨리고 있어 목소리만 들을 수 있을 뿐, 얼굴을 알아볼 수는 없었다.




‘전하, 옥체 미령 하시옵는지요?’




‘아니, 천지간에 이런 망발이 있을 수 있단 말이오? 주상께서 시퍼렇게 존재하여 계신데, 어찌 무엄하게, 나 같은 미천한 미물에게 주상의 어체를 견준단 말이오?’




‘그건 그렇지 않사옵니다. 어린 보령으로 주상께서 보좌에 오르시기는 하였으되, 지금 조정은 김대감의 마수에 포획되어 시시각각 암흑의 나락으로 격추하고 있나이다. 이에 분격한 많은 충절지신의 간곡한 상소가 있었으나, 이미 대세를 장악하여 허수아비에 불과한 상감마마를 등에 업고, 역적 괴수 김대감은 무참한 살생을 자행하고 있으며, 뿐인 줄 아십니까? 민생을 외면한 조정의 꼭둑각시들은 하루가 다르게 무거운 세금을 민초들의 힘 없는 어깨 위에 들어 붓고 있어, 이미 민심이 이반 되고 있는 줄로 아뢰오.’ 




‘그렇다면 어찌하여 나 같은 몰락한 선왕의 핏줄에게 그런 사견을 비추는 것이오?’




‘나라와 종묘사직을 위함 이옵니다. 분연히 일어서시어 흔들리는 국가의 존망을 바로 잡아 주시고, 아울러 나라의 기초를 갉아먹고 있는 간신배와 탐관오리 들을 발본 색원하여, 뿌리를 쳐내심이 가한 줄 아뢰옵니다. 저의 이 충언은 역모가 아니옵니다. 이미 주상께 바로 진언 드리지도 못하는 불충의 죄를 지은 바, 이번 거사를 계기로 목숨이라도 초개와 같이 내걸 것을 맹약 드리옵니다. 사사로운 감정으로 드리는 사견이 아님을 헤아려 주시옵소서.’




‘그럼 내가 어찌 하면 좋겠소?’




‘그저 때를 기다리소서. 때가 되면 전하를 옹위하여 궁으로 물밀듯이 밀고 들어갈 것이옵니다, 그때 까지 만이라도 대업을 이룰 수 있도록 옥체 보존하시어, 억조창생과 종묘사직에 부끄럽지 않은 성군으로 우뚝 서실 것을 충정으로 앙망 하옵니다.’ 




아마도 그 사람은 병권을 장악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음이 분명했다. 그 자가 돌아가고, 여인이 다시 방으로 찾아 들었다.




‘전하, 궁금증이 풀리셨는지요? 대업을 앞두고 계시는 작금의 시절에 여인네의 좁은 소치로 간언 드리옵니다만, 명일 부터는 다시 예전의 의관을 드릴 터이니, 걸식의 생활로 돌아가시옵소서.’




‘아니, 그건 또 무슨 말씀이오?’




‘이미 속속 결전을 앞둔 군사들이 도성의 주변을 향해 숙영지 에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합니다. 이미 사람들은 저자거리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으시는 전하의 얘기로 너무도 시끄럽사옵니다. 의심은 사서도 아니 되고, 사게 되면 거저 주어 버리라는 말이 있사옵니다. 예전의 몰락한 왕족의, 벌레만도 못한 삶을, 다시 사람들에게 각인 시키소서. 그래야 목숨을 부지 할 수 있나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김대감의 서슬이 언제 전하의 안위를 해칠지 알 수 없사옵니다. 이미 김대감은 이런 운기를 눈치채고 곳곳에 칼을 들이대고 있고요.’ 




불빛 속에서 일렁이는 그녀의 눈빛은 결연함과 애처로움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래, 네 말에 일리가 있구나. 그렇다면 이 밤, 이렇게 지낼 일이 무엇이더냐? 저자거리의 구석진 곳에 나아가 거렁뱅이 처럼 잠을 자도 잘 것을, 어찌 하루라도 더 너의 심신을 괴롭게 하리!’




‘그러나, 이년, 전하를 모시고 있었다고는 하나, 이제까지 기쁘게 해드린 적이 한 번도 없었음이 가슴 미어지 나이다. 오늘 하룻밤만은 전하를 위해 이년, 즐거움을 드릴 수 있도록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나는 그제서야 그녀가 장안에 내노라 하던 명창,명기인 설화였음을 알게 되고…그 밤을 수놓는 그녀의 구성진 가락과 애간장을 끊는 듯한 거문고 가락의 비장함이 눈물 마저도 부끄럽게 나의 심금을 흔들고 있었다. 악기를 치우고 나서, 그녀는 내 옆에 다가와 술을 따랐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좀더 자세히 보려고 하였으나, 쉽사리 되어지질 않고…..그녀가 나의 앞에서 일어나 옷고름을 풀어 헤치면서 춤사위를 밟기 시작한다. 일렁이는 촛불의 잔영 속에서 그녀의 작은 얼굴은 애잔한 미소로 가득하고, 허공을 달래는 듯한 그녀의 춤사위는 몸에 걸친 옷가지 마저도 허락하질 않았다. 온 살이 다 비치는 하늘하늘한 속곳이 그녀의 몸을 타고 흘러 내리자, 그녀는 나에게 다가서며, 촛불을 껐다. 훅하고 다가서는 여인의 향내… 얼마 만인가? 나의 품에 살포시 안기며,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전하, 이것 하나만은 반드시 약조하여 주실 수 있겠사옵니까? 국운 승기의 날이 오면 출정에 앞서 저를 반드시 찾아 주시겠다고….’




‘암. 그러고 말고, 나를 거두어 보살펴 준 너의 은공은 내 잊지 않으마.’




나는 맨 살로 나의 품 안에서 떨고 있는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고서 보료 위로 그녀의 나신을 뉘였다. 교교히 달빛이 방안으로 흘러 들고, 그녀의 봉긋한 젖매무새가 희미하게 드러날 즈음에, 나는 그녀가 명기임을 실감하게 된다. 내 옷을 풀어 젖히며, 감히 여인네의 행색으로는 범접하기도 어려울 남정네의 육봉에 거침없이 입을 맞추는 그녀가 아닌가? 




‘설화야, 너 어찌, 이리도 나를 달뜨게 하느뇨? 윽윽윽…’




‘전하, 전하의 옥체가 오늘 만큼은 이 년의 하늘 이옵니다.’




그녀는 도리어 나를 뉘여 놓고는 나의 위로 올라가 육봉에 고깔 덮듯이, 그 향긋한 둔부를 내려 앉히고……만져보지 않아도 그녀의 음문에서는 음수가 계곡 되어 내 살을 적시고, 나의 두 팔은 그녀의 두 손에 감싸여져 그녀의 젖무덤과 함께 땅이 꺼지는 떨림 속에 나락으로 향했다. 술 때문만도 아니고, 나는 전신의 기력이 뽑혀져 나가는 것 같은 허탈감을 하초가 저리도록 느끼면서 맥을 놓았다.






‘꼴 보래요, 꼴 보래요…….’




나는 선듯한 기운에 눈을 떴다. 간 밤의 운우의 정이 꿈이었던가? 나는 길바닥에 대자로 누워 잠이 들어 있었고, 아이들은 누워있는 나를 둘러서서 온통 흙투성이에 남루한 도포자락을 꼬깃꼬깃 옹크리면서 잠이 든 나의 몰골을 놀려 대고 있었다. 아마도 설화는 술에 몽혼약을 탔던 모양이었다. 내가 잠든 사이, 옷을 갈아 입히고, 온 몸에는 숯검댕이를 묻혀 저자거리에 몰래 갖다 놓은 것이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쟁쟁하게 들리고 있었다.




““예전의 몰락한 왕족의, 벌레만도 못한 삶을, 다시 사람들에게 각인 시키소서. 그래야 목숨을 부지 할 수 있나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김대감의 서슬이 언제 전하의 위안을 해칠지 알 수 없사옵니다.””




‘얘들아! 나 배고픈데, 밥 쫌 줘. 잉 으허허, 낄낄…우헤헤헤…..’




둘러선 아이들의 놀리는 소리와 나의 행동을 보고 사람들은 혀를 찼다.




‘아니, 기생년 한테 빌붙어 산다더니, 저 꼴은 또 뭐래?’




‘자네도 좇대가리가 제대로 붙어 있으면 알 거 아닌감? 저런 미치광이 거렁뱅이를 무엇에다 쓰게 꿰차고 앉았누?’




‘그러니 나라가 요모양 요꼴이지…쯧쯧’




그 탄식을 사람들 사이에서 듣고 있던 자는 다름 아닌 나에게 엽전을 뿌려대던 김대감의 가신, 그 놈 이었다. 부리나케 달려가는 꼬락서니를 보면서, 나는 일이 제대로 되어가고 있구나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고기 맛을 본 땡중은 벼룩도 남아날 리 없다는 옛말처럼 그녀와 지냈던 오랜만의 평안한 나날 때문이었는지, 거리에서 먹고 자는 일은 예전보다 더욱 혹독하고 참기 힘든 고통 이었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거사에 대한 소문이 들려오고는 있었지만 대체 누가 배후에 있는지 알려진 바가 없기에, 사람들은 입방아를 찧기에 바빴고, 거기에 더하여 쓰레기 같은 삶을 또다시 살아가는, 나를 향한 빗발치는 욕설과 침세례 또한, 만만찮았다. 그러던 중, 캄캄한 그믐날 저녁, 주린 배를 움켜 쥐고, 남의 집 처마 밑에서 잠을 청하던 중, 서넛의 무리가 내 앞에 바람같이 와서 멈추었다. 그들은 주위를 살피며, 순라꾼이 오기 전에 나를 향하여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전하, 어서 기동하소서, 시간이 촉박하옵니다. 갑주가 이미 준비 되었나이다.’




나는 허기진 몸을 이끌고, 그들에게 부축 되어 어디론가 향해 가고 있었다. 그곳은 눈에도 익은 설화의 처소였다.




‘전하, 정말 어려운 일을 감당 하셨습니다. 어서 옥체를 씻으시고, 정기를 북돋우소서. 바로 오늘이 그 날 이옵니다.’




나는 설화의 도움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몸을 정갈히 씻은 뒤, 대청마루에서 갑주를 차려 입고는 혼자 방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방안에는 그녀 대신, 노장군이 갑주를 차려 입고, 검을 든 채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아니, 그대는 오위도총사?’




‘전하, 신의 무례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대업을 이루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처사 였나이다. 신을 벌하시려거든 대업을 이룬후, 죄도 묻지 마시고 바로 목을 치소서.’




‘아니오. 불민한 나를 옹위하여 대업을 진행해온 공의 노고에 내 감읍할 따름이오. 그런데, 어찌 이곳에서 나를 보자고 하시었소?’




그러자, 도총사는 갑주를 입은 채로 바닥에 엎드리면서 간언하기 시작했다.




‘일을 도모코져, 한낱 미천한 계집의 힘을 빌렸사오나, 이제 국운승기의 절초를 맞아, 한치도 전하의 안위를 거스르는 돌뿌리는 없어야 할 것입니다. 세간에 떠도는 말이 사실이 되어, 한낱 천한 기생의 도움으로 목숨을 연명했다는 일설은, 두고두고 전하의 가슴에 상처로 남을 것을 염려한 바, 이렇게 피를 토하는 진언을 드리옵니다. 대업의 칼을 뽑으시기 전에, 비록 그 계집이 성은을 입었다고는 하나, 미천한 그 년의 명줄을 거두고 출전 하심이 가한 줄로 아뢰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이제 만백성의 어버이가 되시고, 종묘사직의 주춧돌이 되실 전하 시옵니다. 한치의 주저함도 있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도총사는 자신의 검을 나에게 올리고 있었다. 나는 등에서 식은 땀이 솟으며, 눈 앞이 까매지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가녀린 자태가 눈 앞에 아른 거리고 있었고, 도총사가 건넨 검이 손안에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알았네, 잠시 말미를 주게나. 설화를 들여보네 주게. 그래도 한 때는 나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아이가 아닌가? 이별주라도 나누고 떠나는 것이 도리라고 나는 생각하네.’




그때 였다. 화려한 옷으로 차려 입고, 작은 술상을 받쳐든 설화가 밝게 웃음지으며, 방안으로 들어섰다.




‘도총관 나리, 염려 마시옵소서. 제가 이미 전하께 부탁 드렸나이다. 잠시 예를 갖추어 전하를 보내드릴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랬다면, 내 미안하구나. 너도 많이 애썼다만, 어찌하겠느냐? 내 장사는 후히 지내주마. 내 이생에서 못 갚은 빚은 어여 따라가 채워 줄 것이다.’




도총관이 나가고, 설화는 나에게 한잔 술을, 잔이 줄줄 넘치도록 그득 따른다.




‘전하, 술잔을 대하실 적 마다……., 이년을……. 기억하여 주소서, 이 잔처럼…… 넘쳤던 성은에……. 이 년,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나이다. 마지막으로 전하의 앞길에 제 소리 한자락 올릴까 합니다.’




그녀는 칼을 안고, 갑주를 걸친 채, 좌정하고 있는 나의 앞에 다소곳이 앉아 부채를 꺼내 들고 처연한 목소리로 소리자락을 토해 놓는다. 그 음조의 구슬픔이 밤하늘을 가르고, 내 눈에서도 하염없이 눈물을 흐르게 하여도, 정작 설화는 그 한 자락 이라도 목메임으로 멈추지 않으려는 듯, 초연하기 이를 데 없고… 




‘이리도 갈적시면 돌아보지나 말 것을,


하늘이 내리 앉고, 물이 놀라 숨을 멎고,


언제쯤 님의 곁에서 소리 한자락 해볼꺼나.


…….’




그녀의 시조 한수가 허공에 산산히 부서진다. 잔을 들고 그 음조가 오가는 허공 속에 그녀의 미소가 흐르고, 가냘프게 울렁대는 그녀의 춤사위가 소리자락에 이어지는데, 그 형국은 어떤 비수보다 날카롭게 나의 가슴에 와서 꽂히니….. 그녀는 다소곳이 일어나 상을 물리고, 내 앞에 다시 앉아 절을 올린다. 




‘나으리, 이년, 이래 살다가도 아무 여한 없사옵니다. 부디 옥체 보존 하시어 대업을 이루소서.’




‘스르릉….’




촛불이 일렁이면서 방안에는 시퍼런 검기가 가득 차 올랐다. 촛불에 비추이는 그녀의 삼단 같은 머리 결에 치켜든 칼날의 섬광이 반사 되면서 그녀의 숨결이 멎어버렸다. 검기가 흘렀는데도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눈을 감은 그녀의 자태는 스러질 줄 모르고 꼿꼿이 나를 향하고, 나는 검을 내려 뜨린 뒤, 방을 나왔다.




‘도총사, 이만 갑시다. 할 일이 많지 않소?’




그 날 저녁, 궁 안은 피바람이 일었고, 도총사는 간신배 들의 연이은 숙청으로 온종일 피바다 속을 헤매야만 했다. 정쟁이 가라앉고, 나는 보위에 올랐다. 하늘의 도우심 이련가? 돌아선 민심은 간신배와 탐관오리의 척결로 말미암아 천천히 왕실을 향한 반가움과 기대로 가득차기 시작했고, 충직한 도총사는 영의정의 직분을 받아, 그야말로 뼈를 깎는 심정으로 청백리의 표본을 보이고 있었다. 그간 홀로 지내오던 나의 곁에도 조정 중신들의 간곡한 청으로 중전 간택이 이어져, 왕실의 경사는 겹으로 흥겨움을 돋우고, 나는 온종일 나라 걱정에, 과거의 쓰라린 일들을 잊고 지냈다. 그러던 중, 왕실의 경사 중에 경사로 중전이 회임을 한 사실이 알려지고, 태아를 위해 잠시 친정으로 피접을 나가게 된 어느 날 이었다. 나 또한 행차의 번거로움은 있었으되, 날을 잡아 피접지로 출영 하게 되어, 내심 들뜨고 있었고…... 




‘폐하, 잠시 쉬어갈까 합니다.’




‘그럽시다. 그런데, 저 멀리 보이는 저 허연 동산은 무어요?’




나는 산마루 자락에 하얗게 보이는 한 무데기의 숲에 시선이 가고 있었다. 신하들이 분주히 움직여 그 연유를 알아보고는 곧바로 나에게 알려주는데,




‘전하, 그건 다름이 아니옵고, 이 곳에서만 특별히 개화하는 야생화라 하옵니다. 보시옵소서.’




나에게 보여진 그 꽃은 수수한 작은 흰꽃 들이 모여서 마치 흰 눈이 뿌려대는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름이 무어라 하더냐?’




‘어떤 이는 설화라고도 하고, 어떤 이는 서리와 닮았다 하여 상화 라고도 한다 하옵니다.’




‘누.누.누가 설화라고 하더냐? 누가, 대체, 무슨 연유로?’




‘그 곳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설화라는 천한 기생이 묻힌 곳이라고 합니다요. 그 기생년이 발칙하게도 가슴속에 품은 정인이 있어 스스로 타인에게 더럽혀 질까 저어하여 자결했다고 하는데, 그 시신을 어느 못된 양반이 자신을 속이고 정인을 피신 시켰다 하여, 시신을 사분오열 조각 내어 장사 지내지도 못하게, 저 산자락에 뿌렸다고 하더이다. 그 후로 저 꽃이 피어나는데, 그 형상이 눈꽃 같아 사람들이 입을 모아 그 기생의 절개를 기리는 의미에서 설화라고 부른다 합니다.’




도총사가 그 날 이후, 설화의 시신을 찾을 길이 없어, 많은 날, 시름에 잠겨 지냈던 기억이 나고 있었다. 아마도 나의 뒤를 쫓았던 김대감 잔당들의 짓이었을 것이고….멀리서 보이는 그 흰 꽃무덤은 마치 언젠가는 내가 그 앞을 지나갈 것을 알았던 것처럼, 그 곳에 버티고 있었다. 어디선가 논에서 피를 고르는 아낙의 구성진 소리자락이 아련하게 들려온다. 다시 어가가 움직였어도 내 마음은 그 꽃무덤에 스러져 움직일 줄을 모르고 있었다.




‘이리도 갈적시면 돌아보지나 말 것을,


하늘이 내리 앉고, 물이 놀라 숨을 멎고,


언제쯤 님의 곁에서 소리 한자락 해볼꺼나.




청죽이 푸르러 세월을 잊을진대,


매화가 지천이라 시절도 고까와라.


이제사 흔들린 가슴 아실 날이 있을고.




잊으려 치를 떨어 쪽진 머리 풀어봐도, 


흐르느니 옥루요, 뻗치느니 연정이라,


뿌리쳐 먼산 되는 그 모습만 눈에 남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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